磨斧作針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그러나,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빨아널어놓은 내복에 얼어붙곤 했던 고드름은 요즘은 찾아볼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만큼
지금 내가 사는 환경이 많이 변했고,또, 몰라볼 만큼 산업화가 많이 이루어진 때문일 것이다. 빠르게 산업이 발전하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이맘때면, 예전의고드름 생각이 많이 난다. 이 시기가 되면 나는 지난 10년 전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2001년, 홍익대학교 산업 디자인과를 졸업하고, 전공과목에도 없고 생소한 분야인 로봇을 만들고 싶어서, 조그마한 회사를 설립해 로봇을
만들었다. 제품으로 상품화하기 위해, 전동장난감시장을 타켓으로 잡고, 3월에 미국의 완구회사를 방문하기로 했다. 그것도 매우 추운 겨울에
뉴욕으로, 스케치 한장만을 들고서 말이다. 케네디 공항에서 내려 입국심사에서 심사관이 나에게 방문목적을 질문했다.덩치가 매우 큰 흑인여성인데,
잘 알아들을 수없는 발음으로. 사실 미국대사관에서 비자발급 인터뷰에서,나의 이력과 방문목적에 대한 인터뷰 주제를 로봇과 디자인으로 설명을 하니,
심사관이 웃으면서, 꼭 좋은 결과를 바란다는 말을 해주었기에..그녀의 질문에 좀 짜증이 났지만, 로봇사업 때문에 왔다고 하니, 도장을 꽝!!하고
찍어준다.
거의 7일에 걸친 토이쇼가 뉴욕의 45번가 주변 자비스센터에서 열리고, 4개의 완구 업체와 미팅을 준비하고 있었다. 첫회사는 ‘라디카’라는
완구회사였는데, 회의실이 아니라 상담실에서 진행되는 미팅은 10분 정도의 미팅시간만 주어져 있었던 걸 뉴욕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미국이란
나라는 시장의규모로 움직이는 것을 어린 나는 이때 알게 되었다. 14시간을 비행하고 온 나에게 주어진 미팅시간이 고작
10분이라니…
부사장이라는 백인친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그에게 스케치 한 장을 건네며, “이것을 당신네 회사에 팔고
싶다”고했다. 그러자 부사장이, “만들어 오면, 그러면 사겠다,디자인은 나쁘지 않네”라고 했다. 단 1분만의 대화..난 그 자리에서 그냥
일어나기 아쉬워 “ 내가 만들어 올 때까지 부사장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했다. 어디서 그런멘트가 생각났는지…그리고 나머지
미국체류기간 동안 이것
을 어떻게 만들까 하는 생각만 하다 귀국을 하고, 지난 7월, 홍콩 쇼에서 만난 중국회사를 방문하기로 했다.사실 이
당시 나는 스케치만 가지고 준비한 것이 아니고, 개발을 국내에서 어느 정도까지 끝내놓은 상태였기에, 생산에대하여 그리 긴장하는 편은 아니었다,
또한, 홍콩의 스탠다드 회사는 그전에 우리회사를 방문하였고 제품 생산에 대한MOU와 물류,운송에 관한 협약을 맺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스탠다드의 사장인 “샘”이 직접 공항에 마중을 나와 중국공장으로 안내한다고 출국 전날 연락이 왔다. 공항에는 샘이 나와서 연신 “웰컴”을
외친다. 시간이 지나서 알았지만, 이 친구는 캐나디언으로 나보다 영어문화가 익숙한 친구인데…웰컴만 외치다니..나의 첫 중국입국은 “샘”과 함께
홍콩을 통해 이
루어지게 되었다.지금이야 많이 변했지만, 그 당시는 홍콩공항에서의 대한민국 표기가 중국에서는 대한민국 “한성” 서울은
“수우”로 표기했었다, 중국에서 보기에도 우리는 그들의 변방의 조금한“성”하나와 같은 작은 존재였을 것 같다. 홍콩과 중국의 입국심사를 받으며,
왜 같은 나라가 두 개의독립적인 체제로 분리되었는지 의문이 생겼지만, 그보다 내가 가장 먼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중국 특유의 날씨와
향이었다.뭔지 모르게 습하고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향이었다. 나라마다 고유한 향이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으니.. 중국의 입국심사를 마치고,
“샘”이 준비한 왜건을 타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샘”은 연신 공장의 규모와 능력 그리고, 공인들의 임금과 연령대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많은
얘기를
들려주었다.후에 들은 얘기지만, 150Km이상의 속도로 1시간 30분 정도를 가야 하는 거리므로, “샘”이 이것저것 중국에 관한
많은 얘기를 준비했다고 한다.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속도로 주변은 논과 산, 뜨문뜨문 있는 건물과
광고판이 주변 풍경인데, 이상하게 심천을 출발한 이래 차창 밖으로 보이는 고속도로 너머의 풍경은 빨강과 파랑, 노랑의 원색적인 프랭카드 같은
조각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줄곧 나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여서 무언가에 대한 홍보나
계몽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샘”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샘”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아, “이카(나의 외국이름), 저건 중국공장들에서 일하는
공인들이 묶는 숙소건물인데, 울긋불긋한 것은 공인들의 옷들이야” 뭐라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중국제조산업의 규모에 대해 나는 직접 공장을
방문하지도 않은 상태지만 심천에서 호문까지 가는 길 위에서 직접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규모의 단지가 중국전역에 걸쳐 여러 개 있다는 말을
“샘”에게 들은 다음 내게 든 생각은 “한국이란 나라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란 것이었다.
저녁쯤에 도착한, 공장 근방의 건물들은 내가 어릴 때 보아왔던 벽돌을 직접 굽고 일하는 모습들이 이상하리만치 더 정겨운 생각이 들게 했다.
어릴 적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이랄까 1시간 30분을 달린 우리 차는 동관의 한 공장에서 멈추었고,나는 곧 공장 임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안내된
방으로 갔다.나에게 제공된 방의 규모와 음식들은 이들이 얼마나 생산에 한 많은 경험이 있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 바로 공장 견학을시켜달라는 나의
요청에 의해 공장의 견학이 이루어졌다. 7층으로 이루어진 4개동의 건물에는 분업화된 라인에서 전문적인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생산라인,
도장, 조립,검사, 운송 등. 매우 큰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곳에서 일하는공인들은 쉽지 않은 일들을 반복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사실, 개발팀 1진을 1개월 전에 중국현지에 보냈던 터라, 나름 많은 진척이 생산에 있어서 진행될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하루 동안
업무를 보고받고 난 후의 생각은 그냥 1개월의 시간이 허비된 느낌이었다. 업무보고를 받고 문제점으로 생각된 것은, 한국의 개발팀의프로세서와
중국의 생산 프로세서가 전혀 맞지 않는다는 거였다. 한국의 경우는 나름 더 정확하고 정교한 시간과 공정으로 생산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고,
중국의 공장에서는자신들의 경험에 의한 프로세서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거였다. 이유는 결국 생산효율성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당시 무
엇
때문에 일하는 방법이 서로에게 중요할까란 생각이 들었다. 3일을 공장에서 밤을 세우면서, 그들의 공정과 개발의 각 파트 매니저들과의 대화가
이루어졌다. 개인적으로는 각 파트의 매니저에게 공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경험에 대한 얘기. 그리고 우리의 물건에 대한 의견을 듣는데
집중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무언가의 결정으로 새롭게 일을 정리해서 진행해야 한다는고민에서, “나는 당신들의 공장을 둘러보면서 당신들의
능력보다는 당신들의 이제까지 쌓아온 경험을 존중해서 이러한결정을 내리려고 합니다”라고 결정을 내리고, 생산이 진행되는 주체는 중국의 공장이니,
모든 프로세서를 중국공장에 맞추라고 결론을 내렸다. 단, 제품의 검수와 완성도 기준 등은 한국에서 개발한 것을 기준으로 하겠다고 알렸다. 모두들
일에 집중하자는 얘기와 함께 한 달간 정체되었던 업무가 다시진행되었다. 한국 개발직원의 업무에 대해서는 중국의 프로세서를 존중하면 따르게
했으며, 날마다 숙소에서 중국공장의 개발 프로세서에 대한 세세한 부분을 정리하고 또 정리하며 1개월을 중국에서 살았다.돌이켜보면 내
삶에서의 이 한 달이 많은 생각과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 준 가장 큰 변곡점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루에 3시간 이상을 자지 않고, 계속적으로
프로세서의 표를 만들고 또만들고, 또 만들었으니까. 매일 일어난 세세한 개발 과정을 정리하고 지역 매니저들과대화하며, 내가 작성한 프로세서와
예상결과에 대해 그들에게 마치 시험을 치르듯 검사를 해달라고 했다. 한국에서 온,제품의 주인이 날마다 이러한 행동을 하니, 매니저들은 나중에
나를 보면 먼저 인사하곤 했다.아무 가치 없을 것 같은 일이라고 생각되는 이러한 행동이 이들에게 특이하게 보였는지, 다른 제품에 대한
개발, 생산에대한 설명과 견학으로 이루어졌고, 나는 디자인영역 뿐만 아니라 점점 개발과 엔지니어, 생산과 검수, 물류와 무역에 대한 지식들을
몸으로 익히게 되었다.아직도 중국의 공장에 가면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는 중국은 나에게 있어 또 하나의 현실적인 스승이기 때문이다.
디자인 분야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개발과 생산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학습이 이 시기에 이루어지고 있었던셈이다.

사실, 이 당시 중국 공장의 현실은 그리 좋지 않았다. 완구를만드는 큰 규모의 공장이라도 여러 가지 원료와 사출, 조립,포장 등의 공정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으며, 외국의 클라이언트 조건들이 늘 까다로워 완성도와 납기일을 맞추는 것이 공장에서는 가장 큰 이슈거리였다.이러한
환경에서 어떻게 미국에 수출할 제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인지 걱정이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공장의 경험과 한국의 개발데이터, 그리고
끊임없는 의지가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제품을 디자인하고 개발하고, 생산한다는 것은
어떻게 효율적으로 시장에 접목시킬 것인지가 관건인데, 공장이라는생산기지에서 경험한 귀납적 풍경은 내 모든 사고의 관점을 다시 정리하는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다.내게 있어서 중국은 기대를 하고 찾아간 환경은 아니었지만, 또 하나의 선생님 혹은 따뜻한 고향 같은 곳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미국 시장진입을 위한 모든 프로세서가 완벽히 정리되어 모든 것이 걱정 없이 착착 진행될 것을 기대했으나, 한 장의 사진을
공장화하는 일은 결단코 쉽지 않은 일로 매일 밤을 지새우는 너무나 힘든, 또 많이 배우고 경험해야 하는 것이었다. 설령 생산에 맞는 개발 기획이
정해졌더라도 본 게임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1년 후..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